인간극장 6428회 영자 씨 나를 잊지 말아요 1부

제주의 작은 국밥집에서 홍순업 씨(66)는 새벽마다 아내 이영자 씨(64)의 손을 잡고 하루를 연다. 4년 전 치매 진단을 받은 영자 씨가 조금씩 기억을 잃어가는 동안, 47년을 함께한 순업 씨는 다른 것은 모두 잊더라도 자신의 이름만은 기억해 주기를 바라며 아내 곁을 지킨다.

제주시의 작은 국밥집은 이른 새벽부터 순업 씨의 손길로 분주해진다. 차를 타고 이동할 때면 먼저 문을 열어 아내를 챙기고, 가게에 도착해서는 아침까지 직접 준비해 먹인다. 내장을 손질하고 육수를 끓이며 영업 준비를 시작한 뒤에도 순업 씨의 시선은 식당 한편 간이침대에 누워 있는 영자 씨에게 자주 향한다.

영자 씨는 어리광을 부리다가도 금세 토라지고, 기분이 좋아지면 노래를 부르며 몸을 흔든다. 잠시 전까지 웃다가도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릴 수 있어 순업 씨는 일을 하면서도 아내가 어디에 있는지 계속 확인한다. 장사를 준비하는 손과 아내를 살피는 눈을 동시에 움직여야 하는 아침이 매일 반복된다.

순업 씨 옆에는 혼자 감당하지 않도록 손을 보태는 가족들이 있다. 6남매의 막내인 순업 씨를 따라 제주에 내려와 가까이 사는 첫째 형 순갑 씨(75)와 넷째 형 순일 씨(68)는 동생이 가게 일을 하는 동안 영자 씨의 손을 잡고 산책을 나가거나 집으로 불러 밥을 챙긴다. 형수님들도 영자 씨의 목욕을 돕고 옷을 갈아입히며 하루 돌봄에 힘을 보탠다.

서울의 한 공장에서 만나 47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에게 지금의 국밥집은 젊은 날부터 이어진 생활의 한 장면이다. 쌀통이 비었던 날에도, 순업 씨가 직장을 잃고 방황하던 때에도 영자 씨는 남편 곁을 지켰다. 이제 그 시절을 하나씩 잊어가는 아내 앞에서 순업 씨가 반복해서 묻는 말은 “내 이름 기억나? 나만은 잊으면 안 돼요”다.

내 아내는 ‘빠삐용’

영자 씨가 치매 진단을 받은 뒤 순업 씨의 하루에는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이 자주 생겼다. 가게 안에 있던 영자 씨가 어느 순간 밖으로 나가면 순업 씨는 하던 일을 멈추고 뒤를 따라간다. “영자 씨, 어디 가요!”라고 부르며 하루에도 몇 번씩 아내를 찾아 나서는 일이 이어져, 국밥집 영업과 돌봄을 따로 떼어놓기 어렵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은 47년 전 서울의 한 공장이었다. 제주에서 올라온 영자 씨에게 첫눈에 반한 경상도 출신 순업 씨는 스물둘, 영자 씨는 스무 살 무렵 부모가 됐고 이후 영자 씨의 친정이 있는 제주에 자리를 잡았다. 젊은 부부는 정착한 뒤 생선 장사와 고물상, 전분 공장 일을 거쳐 국밥집까지 이어오며 가족의 생활을 꾸렸다.

그 과정에서 영자 씨는 먹고사는 일을 가리지 않았다. 생선을 팔고 고물을 다루고 공장에서 일한 뒤에는 국밥집을 20년 넘게 맡아왔다. 순업 씨에게 영자 씨는 힘든 형편에서도 먼저 움직였던 사람이었고, 가진 것 없는 자신을 만나 고생만 시킨 것 같다는 미안함이 남아 있다.

지금은 영자 씨가 해오던 국밥집을 순업 씨가 대신 맡는다. 육수를 끓이고 재료를 손질하고 손님을 맞는 사이에도 아내가 가게 안에 있는지 살펴야 해 하루 24시간 긴장을 늦추기 어렵다. 그래도 영자 씨가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환하게 웃거나 노래와 춤에 신이 나면 순업 씨의 표정도 풀린다.

세 살 아이처럼 금세 토라졌다가도 좋아하는 음식과 노래 앞에서는 다시 웃는 영자 씨를 보며 순업 씨는 여전히 아내가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느낀다. 예전처럼 모든 기억을 함께 꺼낼 수는 없어도, 지금 눈앞에서 웃고 노래하는 아내와 보내는 시간이 순업 씨의 하루를 채운다.

둘도 없는 특별한 단짝, 제수씨와 시아주버님

국밥집에 있던 영자 씨가 갑자기 밖으로 뛰어나가 한 남자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덩실덩실 춤을 춘다. 손까지 잡고 산책에 나선 뒤 영자 씨가 화장실에 들어가면 문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첫째 시아주버님 순갑 씨다. 바로 옆집에 사는 순갑 씨는 가게 일을 거들면서 거의 매일 영자 씨와 걷고 노래하며 시간을 보낸다.

넷째 시아주버님 순일 씨도 제주에 가까이 살며 동생 부부를 돕는다. 요리사 출신인 순일 씨는 형제들을 집으로 불러 직접 텃밭에서 키운 채소로 음식을 만들고, 맛있는 것을 먹을 때 표정이 밝아지는 영자 씨에게 한 끼를 챙긴다. 영자 씨는 시아주버님의 배를 만지며 “사랑해요~”라고 말하고 해맑게 웃는다.

아프기 전에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웠던 모습이지만 지금은 영자 씨와 시아주버님들이 서로 손을 잡고 산책하는 특별한 단짝이 됐다. 형수님들도 과일을 깎아 먹이고 목욕과 옷 갈아입기를 도우며 영자 씨를 살핀다. 순업 씨에게는 가게를 비우거나 잠깐 숨을 돌릴 때 아내 옆을 지켜줄 사람들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힘이다.

형제들이 제주에 자리 잡은 데에는 막내 순업 씨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 마음은 이제 순업 씨뿐 아니라 영자 씨를 함께 돌보는 일로 이어졌다. 누군가는 산책을 맡고, 누군가는 밥을 준비하고, 또 누군가는 씻고 옷 입는 일을 도우면서 한 사람에게 쏠릴 수 있는 돌봄을 가족이 나눠 맡는다.

육지에 사는 셋째 형 순종 씨가 제주를 찾는 날에는 또 다른 장면이 기다린다. 1년 만에 만나는 셋째 시아주버님 앞에서 영자 씨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가족들은 지켜본다. 기억이 하루마다 달라지는 만큼 오랜만에 만난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지가 새로운 순간이 된다.

영자 씨, 나를 잊지 말아요

늦은 밤 부부를 찾아온 손님을 본 영자 씨는 환하게 웃으며 반긴다. 찾아온 사람은 아들 성표 씨(44)지만, 반가운 표정과 달리 영자 씨는 끝내 아들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한다. 가족을 마주하고도 이름이 연결되지 않는 순간은 최근 들어 말수가 줄고 기억이 더 흐려지는 영자 씨의 변화를 그대로 보여준다.

순업 씨는 그 모습을 보고 낙담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뇌에 좋다고 알려진 음식과 영양제를 빠뜨리지 않고 챙기고, 저녁이면 식탁에 마주 앉아 한글 공부를 한다. 종이 위에 가족들의 이름을 적어보게 하며 기억을 붙잡을 시간을 매일 만든다.

영자 씨는 다른 가족들의 이름을 엉뚱하게 적을 때가 있지만 ‘홍순업’ 세 글자만은 또박또박 적는다. 순업 씨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글자를 바라볼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진다. “다른 건 다 잊어도, 홍순업은 잊으면 안 돼요”라는 말에는 언젠가 아내가 자신마저 알아보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래도 순업 씨는 아직 오지 않은 날보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택한다. 아내가 좋아하는 것을 챙기고, 함께 글자를 쓰고, 산책을 나가며 같은 질문을 다시 건넨다. 기억이 조금이라도 천천히 흐려지기를 바라면서 아내 옆에서 반복되는 하루를 함께 보낸다.

산책을 좋아하는 영자 씨를 위해 바다로 나간 날에는 두 사람이 해변을 함께 걷는다. 모래사장에 나란히 이름을 쓰면 파도가 밀려와 글자를 지우지만, 부부는 다시 모래 위에 이름을 적는다. 사라진 글자를 몇 번이고 다시 쓰는 모습은 순업 씨가 매일 아내에게 자신의 이름을 묻는 일과 닮아 있다.

1부 줄거리

1부에서는 제주에서 국밥집을 운영하는 순업 씨와 영자 씨의 현재 생활이 먼저 펼쳐진다. 원래 20년 넘게 영자 씨가 맡았던 가게지만 4년 전 치매 진단 이후 순업 씨가 주방과 영업을 책임지고, 동시에 아내가 어디로 가는지 살피며 하루를 보낸다.

어느 순간 세 살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고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영자 씨 곁에는 순업 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제주에 사는 형들이 산책과 식사를 챙기고 형수님들이 목욕과 옷 갈아입기를 도우며, 순업 씨가 혼자 감당하지 않도록 가족들이 곁을 나눠 지킨다.

늦은 밤에는 부부를 찾아온 손님을 향해 영자 씨가 밝게 웃는다. 반가워하는 모습과 이름을 떠올리는 일 사이에 어떤 차이가 생겼는지, 그리고 그 손님을 마주한 부부의 밤이 어떻게 이어지는지가 첫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으로 연결된다.

영자 씨가 다른 가족 이름을 엉뚱하게 적으면서도 ‘홍순업’ 세 글자는 또박또박 쓰는 순간, 순업 씨는 아내의 기억 속에 자신의 이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날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기억 속에서 영자 씨는 남편의 이름을 얼마나 오래 붙잡고 있을까?

파도에 모래사장의 이름이 지워지면 다시 적듯 순업 씨는 오늘도 아내에게 이름을 묻고 곁을 지킨다. 두 사람이 47년을 함께 지나온 시간과 지금 이어가는 하루는 8월 10일 월요일 오전 7시 50분 KBS1 ‘인간극장’에서 시작된다.

사진 :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