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고전, 역사를 바꾼 100책’ 유한계급론

EBS ‘AI 고전, 역사를 바꾼 100책’은 9월 7일부터 18일까지 평일 밤 12시 5분 EBS 1TV에서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을 다룬 10편을 선보인다. 한 편당 15분으로 구성되며, 노명우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가 감수에 참여했다.

창밖에서 세상을 바라본 남자

이번 ‘유한계급론’ 시리즈는 AI가 재현한 1899년 시카고대학교 연구실을 무대로 42세의 베블런이 직접 강의하는 1인칭 형식을 택했다. 책의 핵심을 단순히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는 왜 필요해서가 아니라 보여주기 위해 소비하는가’라는 질문을 현재의 소비문화까지 이어 붙이는 구성이다.

1899년에 출간된 책과 2026년 사이에는 127년이라는 시간이 놓여 있다. 그러나 프로그램은 그 시간차보다 베블런이 포착한 소비와 지위의 관계가 오늘날에도 얼마나 선명하게 남아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명품과 SNS, 학벌과 교양처럼 시대에 따라 모습은 달라졌지만 타인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보여주려는 욕망은 여전히 소비의 중요한 동기로 작동한다.

호화로운 파티를 창밖에서 들여다본 남자의 기록

1857년 미국 위스콘신에서 노르웨이 이민자 가정의 열두 자녀 중 여섯째로 태어난 소스타인 베블런은 농장 공동체에서 성장했다. 칼턴 칼리지를 졸업한 뒤 존스홉킨스대학교와 예일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1884년 예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곧바로 대학의 자리를 얻지는 못했다.

일자리를 찾지 못한 그는 약 7년 동안 농촌으로 돌아가 독서와 개인 연구를 이어갔다. 1891년 서른네 살에 코넬대학교에서 경제학을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만난 경제학자 J. 로런스 로플린이 이듬해 새로 세워진 시카고대학교로 옮기자 베블런도 함께 자리를 옮겼다.

시카고대학교는 존 D. 록펠러의 후원으로 설립된 학교였다. 거대한 자본이 세운 대학에서 베블런은 부와 지위가 어떤 방식으로 소비와 생활양식을 지배하는지 파고들기 시작했다. 시리즈는 도금 시대의 화려한 저택과 파티를 바깥에서 바라보는 베블런의 시선을 시각적으로 재현해, 상류계급 안에 속하지 않은 관찰자가 그들의 소비 습관을 해부하는 구도를 강조한다.

1899년 시카고에서 집필한 《유한계급론》은 부유한 계층이 재화와 시간을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방식을 분석했다. 이 책에서 널리 알려진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와 ‘과시적 여가(conspicuous leisure)’의 개념이 제시됐고, 베블런은 부가 단지 소유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인정받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짚었다.

책이 나온 뒤 베블런의 학문적 경력은 시카고에서 스탠퍼드, 미주리대학교 등으로 이어졌고 말년에는 스탠퍼드 인근의 작은 집에서 지냈다. 화려한 상류사회를 분석한 학자가 끝내 그 세계와 거리를 둔 채 살아갔다는 점은 프로그램이 내세우는 ‘창밖의 관찰자’라는 이미지와도 맞닿는다.

시카고대학교 연구실에서 – AI가 재현한 1인칭 강의

시리즈가 재현한 공간은 화려한 강당이 아니라 책더미와 낡은 책상이 놓인 소박한 연구실이다. 42세의 베블런은 책을 펼치고 구절을 짚어가며 자신의 개념을 직접 설명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강의의 말투도 화려한 웅변과는 거리가 멀다. 테이블에 앉아 단조롭고 건조한 목소리로 소비 관습을 설명하며, 마치 자연학자가 낯선 사회를 관찰하듯 인간이 왜 지위를 드러내려 하는지 하나씩 해부한다.

시리즈에 담긴 ‘그만둘 수가 없었다’는 표현은 이런 베블런의 독특한 강의 이미지를 압축한다. 실제 베블런은 학생들에게 친절한 명강사로 기억되기보다 무심하고 도발적인 강의 방식으로 알려졌지만, 프로그램은 바로 그 거리감과 건조함을 AI 1인칭 강의의 성격으로 가져온다.

2026년 현재, 1899년작 《유한계급론》은 왜 유효한가

《유한계급론》이 출간된 지 127년이 지났지만 베블런이 묘사한 세계는 사라지기보다 새로운 매체와 시장 안에서 더 정교한 형태로 나타난다. 프로그램은 19세기 상류층의 저택과 사교 공간에서 작동했던 과시의 논리를 오늘날의 SNS, 명품 소비, 교육과 문화적 권위로 확장해 바라본다.

베블런에게 소비는 단순히 필요를 채우는 경제행위가 아니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돈과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통해 사회적 지위를 드러낼 수 있고, 다른 계층은 그 생활양식을 따라가며 다시 새로운 소비 경쟁을 만든다.

알고리즘 시대의 과시적 소비

SNS 피드는 과시적 소비가 가장 빠르게 전시되는 공간 중 하나다. 명품 가방, 해외여행, 프라이빗 다이닝처럼 개인의 생활을 보여주는 장면은 단순한 기록인 동시에 자신의 취향과 경제력, 사회적 위치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신호가 될 수 있다.

19세기에는 한정된 사교 공간과 저택의 파티에서 드러나던 지위 경쟁이 이제는 실시간으로 수많은 사람에게 전달된다. 알고리즘은 많은 반응을 얻는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노출하고, 사람들은 그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욕망과 비교 기준을 학습한다. ‘필요해서가 아니라 보여주기 위해 소비한다’는 질문이 디지털 환경에서 다시 날카롭게 들리는 이유다.

비쌀수록 더 잘 팔리는 역설

일반적인 수요 법칙에서는 가격이 오르면 수요가 줄어드는 방향을 예상한다. 그러나 지위를 보여주는 고가 상품에서는 비싼 가격 자체가 희소성과 신분을 나타내는 신호로 기능하면서 단순한 가격 경쟁과 다른 소비가 나타날 수 있다.

오늘날 ‘베블런 효과’로 불리는 현상은 《유한계급론》의 과시적 소비 개념에서 이름을 얻었다. 에르메스 버킨백처럼 높은 가격과 희소성이 브랜드의 상징성을 강화하는 명품을 떠올리면, 소비자가 기능만이 아니라 ‘그 가격을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까지 구매한다는 베블런의 문제의식을 이해하기 쉬워진다.

따라서 핵심은 비싼 물건이 언제나 가격이 오를수록 더 많이 팔린다는 단순한 공식이 아니다. 어떤 시장에서는 가격 그 자체가 지위를 보여주는 정보가 되고, 그 정보가 상품의 효용 일부로 작동할 수 있다는 역설에 있다.

대학 학벌과 ‘쓸모없는 지식’의 권위

베블런은 《유한계급론》 마지막 장에서 고등교육과 학문의 권위도 과시와 낭비의 관점으로 살폈다. 특히 영어의 전통적 철자법을 낡고 복잡하며 익히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 사례로 들면서, 바로 그 비효율성이 학문적 평판을 가르는 표식으로 쓰일 수 있다고 비판했다.

고전어와 오래된 표현, 실용성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 지식이 높은 교양의 상징으로 취급되는 현상에도 같은 시선을 적용했다.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익혀야 하는 지식은 그 자체의 내용뿐 아니라 ‘그 시간을 쓸 수 있었던 사람’이라는 신호를 함께 전달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명문대 졸업장, 클래식 음악에 대한 소양, 라틴어 인용 같은 문화적 자본을 바라보는 데도 이 문제의식을 연결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이 모든 교양과 고등교육이 쓸모없다는 뜻은 아니다. 베블런의 질문은 어떤 지식이 왜 높은 권위를 얻는지, 그 평가 안에 실제 효용 외에 계급과 평판의 기준이 얼마나 섞여 있는지를 따져보라는 데 가깝다.

127년 전 상류계급의 소비와 여가를 해부한 《유한계급론》은 알고리즘이 취향과 욕망을 증폭하는 시대에 다시 ‘보여주기’의 의미를 묻는다. 베블런이 지적한 과시의 논리 가운데 지금 우리의 소비와 가장 닮아 있는 장면은 무엇일까?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을 다룬 EBS ‘AI 고전, 역사를 바꾼 100책’은 9월 7일 월요일부터 9월 18일 금요일까지 평일 밤 12시 5분 EBS 1TV에서 방송된다.

사진 : EBS